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르스크 전투 (문단 편집) == 서론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1O3brG_k0LU)]}}}|| || 쿠르스크 전투의 30초 전개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 이후 [[독일 국방군]]은 캅카스에서 전면 후퇴를 결정한 이후로 소련군의 공세에 족족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독일군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는데에 성공했고 이후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 과정에서 쿠르스크 지역에 남북으로 250km, 동서로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독일 소련 양측의 크나큰 이목을 끌게 되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 돌출부를 포위하는 성채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원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르면 성채 작전은 5월 3일에 게시되어야 했으나 완고한 소련군의 방어에 맞추기 위해 독일군은 2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공격을 미뤄야 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여름 중으로 쿠르스크 돌출부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으며 소련군 총 인력의 40%와 기갑 부대의 75%를 쿠르스크 지역에 투입하였다. 7월 4일 성채 작전이 게시되고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 두 군데로 공격을 가했다. 북쪽에서의 공격은 시원찮았으나 남쪽에서는 양측 모두 상황이 급박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3제곱킬로미터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에 전차가 뒤엉키며 서로에게 포화를 내뱉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으며 양측 도합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독일군은 진격에 실패하고 주저앉았고 7월 10일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시칠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하며]]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히틀러는 공세 중단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육군최고사령부의 반대로 논쟁이 이어지던 와중에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세가 끝나기도 전인 7월 12일부터 오룔 방면으로 쿠투조프 작전을 시작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7월 13일에 성채 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던 하리코프 방면에서는 17일까지 롤란드 작전을 진행했으나 미우스 방면에서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공세가 중단됐다. 이어서 8월 3일부터 벨고로드 방면으로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이 8월 23일까지 이어졌고 독일로부터 벨고로드 시와 하리코프 시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하며 쿠르스크 전투는 끝을 맺게 된다. 흔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다. 쿠르스크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는 달리 역사상 최대 수준의 기갑, 항공 전력이 동원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전투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교전, 그리고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 국방군|독일군]]을 포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http://www.ww2f.com/topic/52116-stalingrad-vs-kursk-which-was-larger/|외국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이 전투의 일부인 쿠르스크 남부, 오보얀 쿠르스크 북부에서 일어난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였으며[* 과거엔 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알려졌으나 독일 측 사료가 연구결과, 프로호로프카 전투의 독일측 전차 수량이 더 적게 추정되었고 참가 전차 숫자면에서는 1940년 벨기에 장블루 전투가 더 컸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1940년에는 중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지 않았고, 경전차같은 가벼운 체급의 차량들이 기갑전력의 주축이었다. 반면 쿠르스크에서는 기본이 중형전차 이상에 각 군이 애지중지하는 중전차를 다수 투입한 대규모 교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전차들의 화력을 기준으로는 쿠르스크 전투가 최대의 전차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역에서 양 군의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하였다.[* [[6.25 전쟁]] 3년 동안 투입된 자유진영&공산진영 양측 병력 합계가 210만이 조금 넘는다.]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도권 전환의 시발점이였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시켜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을 제대로 격파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소련군의 반격에 주요 도시들을 탈환 당하는 등 앞으로 두번 다시는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